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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예(Craft)

입사 공예 시리즈 (2) - 입사의 역사

by 학쓰 2022. 8.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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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사의 기원

자체의 금속 바탕에 성질이 다른 금속을 집어넣어 색채 대비를 통해 무늬를 나타내는 이러한 기술의 배경은 금속에 보석을 넣은 것에서 출발한 것으로 추측되는데, 시리아의 다마스쿠스에서 발견된 기원전 14-15세기 무렵의 금 입사된 철제 도끼가 가장 오래 유물로 알려져 있다. 아시아에서 입사 기법의 기원은 중국의 상주 시대에 송록석을 감입한 것으로부터 시작되어 주로 양쯔강

본인의 입사 작업 중 일부

이남 지역을 중심으로 한 동주 시대(기원전 771-기원전 256)에 가장 성행하였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궤, 정, 대구, 금구, 거울 등과 같은 각종 청동기나 기명들에 입사 기법이 확인되고 있다. 이곳에는 금과 은은 이용해 무늬를 장식하기도 하고, 청동기의 표면에 음각한 뒤, 붉은 구리선을 나선 모양으로 감아 장식 금속들 만들어 기물의 표면에 감입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기법은 한, 동진, 까지 이어졌으나 동주에 비해 기법의 정교함은 떨어졌고, 주로 직선적 무늬에만 사용되었다. 이후 춘추전국 시대 후기에는 철제의 공구가 발달함에 따라 더욱 정교한 무늬로 시문 할 수 있게 되었고 이러한 기술이 우라 나라에까지 전래된 것으로 추측된다.

 

 직접 흠을 파 금속을 넣는 본격적인 입사 기법은 한대에 특히 성행하여 착장이라는 입사를 다루는 전문적인 장인이 었었음을 중국 산시성박물관 소장 승평 13년 (268)명 청동기에서 확인해 볼 수 있다. 이곳에 새겨진 "착장형순 주장왕로"라는 명문에 보이는 금착 기법이 바로 입사 기법을 뜻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에서의 입사 기법 역시 한대 이후 중국에서 전래되어 삼국 시대부터 사용된 것을 고분에서 출토되는 금은 입사된 칼과 같은 위세품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입사의 역사

 

삼국시대와 통일신라 시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입사 기법이 등장된 시기는 1세기 전후로, 서북한 지역에 자리 잡고 있었던 중국 한의 낙랑, 대발 지역에서 발견된다. 평양 지방의 낙랑계 고분 출토품인 산운조수문 통형금구에서 금은선으로 입사된 것이 확인되며 같은 유적에서 금은 입사 공예품이 많이 출토되었다. 이후 한사군의 멸망에 따른 이주와 유이민들에 의해 발전된 중국의 금속 공예 기술이 전래되었고 삼국시대에도 이른  시기부터 이러한 기술을 바탕으로 입사 기법이 사용되고 발전되었다고 추측된다. 

 지금까지 확인된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가장 오랜 입사 유물로는 백제 4세기 후반쯤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진 충남 천안시 화성리 출토의 철제 은입사 환두대도(고리자루칼)이다. 아직까지 삼국 시대 입사 공예품으로 알려진 것들은 주로, 백제, 가야, 신라, 고분 출토의 권위를 상징하는 환두대도로 약 20여 점 정도가 확인된다. 이들은 주로 철 바탕에 선으로 입사된 무늬를 보여주며 입사 재료로 금, 은, 동선이 쓰였으나 상당수 유물이 은선으로 장식되어 있다. 신라에서도 환두대도의 고리 또는 검신에 입사되었던 예를 확인할 수 있으나 남아있는 유물이 많지 않다. 그보다는 가야지역에 집중적으로 발견되어, 철제를 잘 다루었던 가야 문화에서 은입사 역시 발달된 것을 알 수 있다. 경북 고령군 지산동에 위치한 가야시대 고분에서 은입사 당초문을 넣은 쇠칼이 발견되었으며 전북 남원에서 출토된 가야의 철제 은입사 환두대도에는 고리 부분을 금과 은선으로 입사하였는데, 육각형으로 분할하여 두 줄의 은선으로 새겨 넣고 육각형 안에 금선으로 꽃 모양을 새겨 넣었다. 유일하게 4세기경에 만들어져 일본 왕에게 하사된 백제 칠지도 역시 백제의 발전된 제출 기술과 입사 기술의 수준을 잘 보여주는 중요한 작품이다. 이처럼 칠지도나 환두대도에서 보이는 철제에 사용된 입사 기술은 철 표면을 또 다른 철로 만든 도구인 정을 이용하여 파내는 작업과 파인 흠에 은실을 박아 넣은 후 연마하는 작업이 진행된다. 이렇게 흠을 파내기 위해서는 바탕에 철보다 강한 정의 제작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이는 철제품의 제작 기술이 높은 수준에 이르렀음을 시사한다. 

 

삼국 시대의 입사 공예는 백제에서 먼저 시작되어 가야 지역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이루어진 점과 주로 환두대도의 고리 부분과 같이 부장품의 일부에서 선 위주로 입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입사 재료는 주로 은을 사용하였고 간혹 금이나 금은을 교차하여 입사한 예도 남아 있다. 

 이후 통일신라에 들어와 칼과 같은 부장품에 입사된 예는 사라지는 대신 청동제 항아리, 철제 호등(발걸이), 금동병 정도의 생활 공예품의 유물이 확인된다. 그 가운데 금은입사가 시문 된 수하 쌍수 문(동물 한쌍이 나무 아래 있는 무늬) 소호는 당을 통해 들어온 서역의 무늬가 화려하고 정교한 입사 기법으로 표현되어 있다. 철제에 화려한 기린 무늬가 금은으로 입사된 등자(발걸이)에는 금속의 얇은 판을 입사 재료로 사용하는 등 삼국시대부터 훨씬 진전된 입사 기술이 발휘뒤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는 8세기 이전에 철류전이라는 금속공예를 관장하는 기관이 설치되어 있어 신라의 높은 공예기술이 축척되어 있었다고 보인다. 비록 실물은 많지 않지만, 보석을 박한 화형 촛대나 금은 평탈경과 같은 예를 통해서 화려한 금은입사 공예품이 제작된 것을 알 수 있다. 통일신라의 입사 기법은 삼국 시대와 달리 청동이나 철로 만든 일상 공예품에 금 또는 은을 입사하였으며 면으로 입사한 예까지 있어 입사 공예기술이 보단 진전되었음을 시사한다. 이처럼 삼국 시대와 통일 신라의 입사 공예는 유물이 많이 남아 있지는 않지만 4세기경에 이미 중국으로부터 기술과 무늬를 받아들여 정착시켰고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와 당으로부터 더욱 새로운 기술과 무늬가 보급되어 더욱 기량이 향상되었다고 보인다. 결국 이러한 입사 기술의 꾸준한 계승은 이후 고려시대의 화려하고 섬세한 입사 공예품으로 탄생할 수 있었던 밑거름이 되었다. 

 

다음은 고려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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